보따리를 버렸더니.....

정광설 2008.05.19 08:36 조회 수 : 559



"드디어 다 왔구나!" 기지게를 키며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천항에서 목선인 장학선을 타고 두시간 이상 파도에 시달리면서 고생하다가,
드디어 하계봉사지로 선정한 녹도에 도착을 한 것 이었다.


가깝고 편한곳 도 있을텐데 이렇게나 먼, 바다넘어 녹도를 봉사할 곳으로 소개해주신 선생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봉사는, 말 그대로 봉사지, 편한 곳 찿아 놀러가는 것은 아니니까,  잘왔어."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마음으로 녹도를 바라보았다.


아담하게 펼쳐진 기슭에 자리잡은 섬마을이 정겹게 느껴지고,
어서 오라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동지나해에서 부터 밀려 오는 은근히 큰 파도에,
고생 많았다고 말하며 반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릴 준비를 하고 나서는데, 앞에서 다른 대원들이 주춤거리며 빨리 내리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오천항에서는 주위에 배들도 많고 또 선착장에 배가 옆으로 바짝댄 상태서 탔기 때문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여기서는 길게 걸쳐 논, 40쎈치 남짓한 널판지를 딛고 내리라는 것 이었다.


앞서 내리는 친구를 보니, 널판지가 출렁거려 좀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아래는 바닷물인데...


섬 아이들은, 배 주위에서 헤엄치며,
우리를 뭐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등에 메고, 양손에는 짐을 하나씩 들고, 출렁거리는 널판지를 건너며 조심 조심 걷는데,
발밑의 바닷물이 눈에 들어오며, 어머니의 피난시절의 무용담(?) 한 토막이 떠 올랐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피난민 배에 어떻게하든 올라타야 되는데,
두 어린 딸들과, 어느덧 상당히 커져 주체하기 쉽지 않게 된 피난민 보따리는,
좁게 이어진, 배를 탈 수 있도록 놓여진 널판지 위로 와가가 몰려드는 피난민들 틈에서,
어머니를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었다.


그 배가 마지막 피난민 배라는 소문에 사람들은 미어 터지고 있었고,
배에 오르다가 밀려서 바다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딸들이 자칫 내 손을 놓치고, 바다에 떨어질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 엄마는,
목숨을 지켜줄 피난민 보따리를 "믿습니다!"하고는 놔 버렸던 것이었다.


"산 목숨에 거미줄 치랴!"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딸이 소중하지!" 하고,
6살, 4살, 두 어린 딸들의 손을 꼭 붙잡고 이리 저리 밀리며 겨우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겨우 배에 올라서서, "이제 배는 무사히 타긴 탔는데, 보따리를 놔 버렸으니 어쩌나..."하고,
언뜻 놔버린 피난민 보따리를 생각하는데,


그 순간 옆에서 누가 발로 엄마 쪽으로 무엇을 밀쳐대는데 가만히 보니까,
"아니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까 딸의 손을 잡기위해 포기하고 놔 버린 바로 그 보따리였다.
이 사람, 저 사람 발에, 이리 저리 채이며, 바다로 떨어지지 않고 인파에 휩싸여,
용케 배안으로 밀려들어 온 것 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치며, 후딱 집어 들고는 배 밑창에 가니 넓은 운동장 같은 홀이 있어,
보따리에서 담요를 꺼내 깔아놓으니, 그게 우리집이라는 경계라는 표시였다는 것이다.


피난 길인지, 소풍 길인지, 어린 딸들 노래시키며 그 재롱을 보면서,
제주도까지의 피난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는 말씀이 어머니의 피난시절 무용담중의 한 대목이었다.


어려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며,
어머니께서 강조하시고 어린 아들이 꼭 기억하길 원하셨던 것은 그뒤에 이어진 이 말씀이었다.




"삶에는 우선 순위가 있단다.  
아깝고 중요하다 생각되지만, 그것을 포기해야 될 때도 있고,
가지고 싶어 죽겠지만 참아야 될 때도 있고, 싫지만 해야 될 경우도 있는 법 이란다.
그럴 때 올바른 우선 순위에 따라 결정할 줄 알아야 된단다."하시며,


그때 무엇이 이순간에 정녕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우선순위가 분명하였기에,
피나민 보따리를 붙잡느라 딸을 놓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며,


개성에 몇년에 걸쳐 보금자리 꾸미고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선택이 우선임을 분명히 알고 행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다.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선 순위 일번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너의 뜻을 펼쳐나가야 되는 것이다'를,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짜리를 앉혀 놓고, 껀수만 있으면 귀에 못이 밖히도록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솔찍히 말해서 잘 알아듣기도 어려웠지만,
"용돈 다 까먹지 말고 헌금해야 된다는 소리를 무지 어렵게 돌려 말하시네!" 생각이 들었었다.


차츰 나이가 들어 이제 인생에 대하여,
지난날의 삶과, 앞으로 있을 나의 삶에 대하여 이모저모 생각할 나이가 되니,
그때 어머님의 말씀의 의미가 조금씩 깨달아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삶의 우선 순위를 슬기롭게 헤아리고,
결단을 통하여 이 우선 순위를 잘 지켜 나갈 때,
우리의 삶은 보다 보람되고 알차게 일구어져 갈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일찍 이러한 점을 깨닫고,
스스로 바람직하고, 올바른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인생은,
축복받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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