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1 가을 쯤 되었을 때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큰 형이, 대전 집에 내려올 때가 아닌데,
어느날 갑자기 내려오는 바람에 들통이 나서 알게된 사건이다.
형이 와서 하는 말이 "엄마가 뭘 보내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면서,
"엄마! 편지에 왜 웬 개 털을 넣어 보내셨어요?"라고 묻는 바람에,
온 식구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듣고 보니 다음과 같은 사건이었다.
지금도 아흔의 연세에, 정정하시며,
큰 아들이라면 지금도 꺼뻑가시는 우리 어머니한테는,
큰 아들은 원래부터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자식이었다.
19살, 대학교 1학년때에 신학대학 동급생인 아버님과 결혼하시는 바람에,
부모님(필자의 외조부모)은 물론, 어머님의 천재성을 일찍 발견하시고,
이 나라의 큰 여성 일꾼으로 키우고 뒷바라지 해줄 요량으로,
서울로 신학대학 진학을 적극 권유했던 선교사님의 뜻을 저버리고,
가난한 신학생의 아내의 위치를 기꺼이 선택함으로 얻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선물로 허락하신 축복 덩어리가 우리 큰 형님이었던 것이다.
어려서 부터 큰 형은 우리 집에선 특별 케이스 였다.
말 그대로 산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형이 원하는 것은 어머님이 어떻하든 해결해 주시곤 하였다.
그런 어머님이 43세가 되신 어느날,
우연히 거울을 보고 머리를 빗다가 뭔가를 발견하신 것이다.
흰 머리카락 한가닥 이었다.
"어느새 나에게도 흰 머리가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이렇게 중차대한 변화는, 하루라도 빨리 큰 아들에게 알려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단다.
그날 저녁,
식구 모두가 잠든 머리맡에서 밥상을 펴놓고,
어머니의 단골 레파토리인 피란시절의 기적같은 이야기들과,
그런 역경 속 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식구를 보호해 주신 이야기며,
어머니는 우리집에 하나님이 보내신 에스더라는 사명감등,
어머님의 감동적인 삶의 스토리를 눈물로 적어 내려가셨던 것이다.
큰 아들이,
엄마의 마음을 확실히 실감케하기 위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편지 위에 그냥 떨어지게 놔둔채, 편지를 쓰셨단다.
밤이 맞도록 쓴 장문의 편지를,
"어미의 흰 머리카락을 보내마!"로 끝 맺고 편지를 봉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찿으니,
아니 이것이 이불펴고, 편지쓰고 하던 중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 이었다.
그리고 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는 밤새 바싹 말라서, 눈물의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흰 머리도, 눈물자국도 없는, 거짓말 편지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분명히 아닌데 증거가 없어졌으니,
할 수 없이 그 비슷한 것으로라도 대용품을 삼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어머님은,
옆집 개를 쓰다듬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머금고 털을 하나 뽑으신 것 이었다.
그 개가, 지금도 생각이 나지만, 흰것과 회색 중간쯤 되는 털을 가진 개 였다.
눈물 자욱은 촛농을 떨어뜨렸다가 후딱 촛물은 닦아내서,
흔적만 남게 해 가지고 형에게 편지를 보낸 것 이었다.
편지를 받아본 형은,
평소 어머님의 본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익히 알고 있던터라 편지 내용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 증거로 보내신 희무끄레한 털이 도저히 엄마 머리칼 같지는 않은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엄마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겁이 덜컥나서 없는 돈을 총 동원하여 대전행 기차를 탔던 것이다.
형님의 물음에,
"거짓말은 아냐. 분명히 흰 머리가 나서 뽑았는데,
그것을 잃어버려서 할 수 없이 비슷하길래 그런거야" 하시며,
겸연쩍어 하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이것이 우리 집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개 털(?)' 사건이다.
어머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자녀들이 어머님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나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어머님의, 자식에게 의지하는, 자식이 알아줬으면 하는 심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개 털'이라도 몰래 뽑아 아들에게 어미의 변화를 알리고 싶은,
우리를 위해 청춘을 바치신 우리 어머님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헤아리고 있나 생각해 보고자 이 글을 쓴다.
작성자 : 팬 at 2008-08-07 11:20 Mod. Del.
어머니가 참 위트가 있으시네요. 건강한 분 같아요.
작성자 : 지나다가 at 2008-08-07 12:19 Mod. Del.
역시나 또 절 감동시키는군요.
선생님의 뛰어난 글 솜씨가 어머니께로부터 온 거 같네요....
작성자 : rkaehd at 2008-08-07 12:33 Mod. Del.
감동,저도 대전 어머니께 문안 인사 전화 지금 드립니다.
작성자 : 팬2 at 2008-08-07 12:36 Mod. Del.
너무 재미 있어 이렇게 웃은 적이 없는데, 뒤로 넘어갈 뻔 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작성자 : 팬2 at 2008-08-07 12:36 Mod. Del.
너무 재미 있어 이렇게 웃은 적이 없는데, 뒤로 넘어갈 뻔 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작성자 : 콩알아빠 at 2008-08-07 15:46 Mod. Del.
성공한 뒤 엄마를 '개털'로 대접하지 말라는 준엄한 암시가 아니었을지...^^
작성자 : 촌닥 at 2008-08-07 16:56 Mod. Del.
우리 어머니와 형의 끈적한 관계와 그 에 비해 '개털'같았던 동생들의 입장이
되살아 난다
작성자 : 단상 at 2008-08-08 09:49 Mod. Del.
아침마다 한번씩 미소짓게 하시는군요..ㄳ
Comment 글쓴이 :
박재하
2008-08-07 11:44 어릴땐 자식들이 부모를 필요해 하지만,나이들어선 부모들이 자식들을 필요로한다는 말이 있쟎아. 나이들고 보니 부모의 진정성을 자식들이 좀더 면밀히 헤아려 주길 바라게 되는구나. 연일 올리는 글 잘 읽고 있다네.
@#*+ㄱㄷ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