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없고 출출해서, "뭐 좀 먹을 것 없나?" 생각하는데, 마침 냉장고 속에 어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도너츠 넣어둔 것이 생각나, 꺼내 먹다보니, 어제의 기분 좋은
만남이 생각난다.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라디오 상담프로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의 일 이었다.

  어느 젊은 여성이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목발을 짚고 힘겹게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두번 씩이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은 전력이 있는 노친네(?)이긴 하지만,
그래도 목발 짚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의협심이 발동한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예측을 못했었나 보다. 깜짝 놀
라며 괞찮다는 부부를 나는 목적지에 다왔노라고 달래서 겨우 앉히고, 열차가 향하는
쪽을 보고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을 때 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하며, 웬 젊은 여성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  네"하고 인사하고 보니, 오래 전 환자였다. 때로는 이럴 때 난감한 경우가 있다.  
환자인 것은 분명한데, 만난지가 오래되서, 어떤 문제로 진료 받았던 분인지가 잘 떠
오르지 않을 때이다. 그런데 어제는 감사하게도, 그 여성의 얼굴을 본 순간, 내 뇌리에
기억되어 있던 그분에 대한 기억과, 그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환자로서 만났을 때와  
다소 달라 멈칫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순간적으로 어떤 문제로 상담했던 경우인지가
떠올랐다.


  부잣집에서 귀하게 컷고, 세칭 일류 여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잘난 아들 두었다고 목
에 힘주며, 며느리 우습게 여기는 시어머니와, "바람도 가끔 밖에 피지 않는데, 뭘 그렇
게 자꾸 난리냐!"라는 생각을 가진 남편과, "내가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런식으로 희생
해야 되는데?"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할 것은 다 하면서도,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생하던 분 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에 잠시 멈칫했던 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여인의 표정은, 다소 어둡고, 눌린
구석이 엿보이며, 슬프고 회심한 느낌이었던데 반해, 어제의 그녀는 밝고, 행복하고,
환한 얼굴이어서 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세요?"하는 것을 보니, 아까의 그 자리 양보 실랑이
때 날 발견했던 것 같았다.

  병원에서의 만남이 별로 유쾌한 기억이 못되어서 그런건진 몰라도, 환자분들이 통상
은 길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 안하는 경우들이 많고, 나 또한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상대가 아는 표시해야, 그때서야 나도 맘 놓고 인사하곤 했었는데, 이 분은 가까
이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첫마디에, "그동안 지내면서 선생님께 많이 감사드렸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었다. 남편과의 관계도 많이 많이 좋아지고, 맘도 많이 안정되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음을 깨달았고, 이제는 스스로 남편에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
다. 아이가 고3이라, 수능만 끝나면 남편이 있는 전방으로 들어가 함께 어려움을 이겨
낼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야기 할 때, 그 표정이 살아있었다. 자신의 문제점을 깨달아 안 사람의 희열이, 그
얼굴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내가 나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었던 데는 선생님의 도움이 아주 컷습니다."라고 말
하며 웃는 모습에서 깨달은 자의 평안함이 느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발동되는, 나의 '생각을 나누려고 하는 열정'이 또 발동되어 한마디
하였다.

  이성(理性)은 반듯하고, 구부러지고가  있을 수 있으나, 감정(感情)은 길이 없는 법
임을 이야기 하였다.

  물이 길 생긴 것 하고는 상관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물꼬 트인 데로 흐르듯, 감정도
따스함이란, 이해함이란, 사랑함이란, 물꼬가 트여 있는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남편이, 아내의 품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배려하고 사랑해 주는
마음이 중요함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전방으로 갈 결심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갈 결심이 부부의 삶을 더욱 견고
하게 하고, 복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병원 앞에서, 지하철을 내리며 인사를 하는데 무엇인가를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도너츠 박스였다. 기뿐 마음으로 드리고 싶다는 말에, "어ㅡ"하다 받아 갖고 들어와,
직원들에게 주면서 뿌듯한 마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감정은 물꼬 트인 곳으로 흐르는 법이다.

  내가 남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고, 아내의 아픈 곳을 다독거리며,
  감정의 물꼬를, 비오는 날 힘들어도 물꼬 트러 나가는 농부처럼,
  사랑이 오갈 수 있는 물꼬를 제대로, 잘 트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왜 날 사랑하지 않냐?"
  "왜 사랑 표현이 이렇게 시덥잖냐?"
  "이 정도 밖에 못하겠어?"하고 원망하기 전에,

  사랑의 물꼬를 잘 터서,
  마음껏 사랑이 오고 갈 수 있게 해야 함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느닷없이 지하철서 얻은 도너츠가, 그렇게 달콤할 수 가 없다......






























@0*
작성자 : rnt  at 2008-08-20 19:30 Mod.  Del.
굿샷!


작성자 : 영감님  at 2008-08-21 11:29 Mod.  Del.
멋지십니다.
사실은 영감탱이가 아니실테지만.


작성자 : 엮어서  at 2008-08-21 12:57 Mod.  Del.
멋진 글들 모아서 단행본으로 출판 하심이....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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