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대첩(三修大捷)

정광설 2008.09.05 21:41 조회 수 : 516


환자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집중이 잘 되지를 않았다.


환자에겐 미안한 마음이 컷지만,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이 아들이 9번째 대입 합격자 발표 보러간 날이 아니던가!


마음을 모아 환자의 이야기에 집증하려 애쓰면서도,
어느새 눈은 전화기 번쩍이는 것에(진료실은 소리를 죽여놓았다),  
간호사의 전갈에만 자꾸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아빠 나는..."하고 큰 딸이,
오빠 용돈 주는 것을 보고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날 따라 아들의 표정이 좀 무거운 듯 하여,
특별 보너스로 아들이 예상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용돈을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 붙였다.
"야, 형소리 들으려면 밥도 좀 사고 그래야지,
삼수생이라고  형 노릇만 하고, 맨날 큰소리만 치면 누가 좋아하겠니?"하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고2 큰딸이 하는 소리였다.


"너도 삼수하면 줄께!"하고 나도 모르게 말이 쑥 나와버렸다.


그때의 아들과 딸의 묘한 표정들이라니......
아들은 미안하기도, 감격스럽기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돈 한번, 아버지 얼굴 한번, 몇번 왔다 갔다 하더니, 후딱 주머니로 돈을 모셔(?)가고,


딸은 일언 지하에 거절당하고,
삼수나 해야 그만한 용돈 받아보게 생겼으니,
"아빠, 나도 삼수하라 소리예요?"하는 듯한,
그 웃는 것도, 인상쓰는 것도 아닌 묘한 모습이라니......



그게 몇달 전 이었다.

아마 그때 그 말이 좀 쇼킹했던 것 같다.

"삼수나 하는 놈이 정신 못차리고!"가 아니고,
삼수 할려면 품위 유지에 비용이 드는 것을 아버지가 미리 알아서 기니까(?),
재미도 있고, 미안도 하고, 감격도 아마 쬐끔은 했었나 보다.
그리고 난 후에는 그전보다 조금 더 공부를 하시는(?) 것 같았다.


드디어 직원이 문을 삐끔히 열더니, 눈짓으로 전화를 가리켰다.
"잠깐만요"하고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후딱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덜커덩 내려 앉았다. 앞이 좀 멍해지는 것 같았다.


1년에 3번씩, 9번째 보는 대학시험 이었다.
어려서 부터 피아노를 잘쳐서,
남자 연주자는 드물고, 인기도 좋고, 가능성이 많으니,
음대 가시라고 그렇게 꼬득여도,


지가 무슨 앞날을 내다보는 도사라고,
"그것만은 안되겠습니다. 취미로는 몰라도, 전공은 안하겠습니다."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그뒤로는 말도 못부치고,
하는 짓만 바라보며,
속만 졸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오직 건축과만,
시험볼 수 있는 기회는 모조리,
충분히 활용하여 이번이 9번째 시험이었던 것이다.



내 아들이,
대학교도 못가면,
애비가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아들이,
깊은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오느냐, 못하냐의 문제인 것 이었다.


그깟 대학생이면 어떻구, 유명인사 아니면 어떤가?
나의 아들이,
"앞으로의 삶을, 좌절과 자괴감에 빠져 어두운 인생을 살면 어떻하나?"가,
나의 고민거리었고 염려였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궁금해 마음조리며,
어떨른지 몰라 차마 내가 하진 못하고,
아들이 전화해주기만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전화에서 풀죽운 목소리로,
"아버지 죄송합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 이었다.


가슴이 덜컹하고, 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어ㅡ, 그래 어떻게 됐니?"하며,
"까짓거, 안 됐어도 괞찮다! 기운내라!" 할려고 맘을 추슬리는데,


아니 요놈에 자식이 애비를 놀려먹어도 분수가 있지,
"아버님, 죄송하게도 등록금 마련하는 수고를 끼쳐드리게 되었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바로 뒤를 이어서,
"아버지, 고맙습니다! 삼수를 하면서, 잡초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어디에 내 놔도, 사막에 갖다 놔도 살아날 자신이 있습니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이눔이 아비를 놀려?"하는 생각은 들다 말고,
"이젠 됐구나!  내 아들이 좌절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나님!
아들이 자괴(自壞)의 늪에서, 자긍(自矜)의 동네로 들어섰습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에,


울컥하고 목메이는 소리로, "오냐.  애비가, 그 수고는 기꺼이 하마!
그럼!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깨달음이 없었다면 사람도 아니지! 수고했다!"
"너무 늦지  말아라!"하고는 전화를 끊고,


앞에 앉아서 영문도 모르고,
거룩하게 폼잡고 대화하다 말고,
콧물이라도 흘릴 듯, 울먹거리며 전화하고,


겸연쩍게 웃으며, 눈물을 훔치며,
전화기를 내려놓는 원장을 쳐다 보고 있는 환자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전화였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말로만 죄송하다지,
실제는 마치 아들이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도 들어간 듯,
어느새 목에 힘이 꽤 들어간 모습으로 인사를 하였다.


마음속으로는,
"허허 우리 아들이,
8전9기의 삼수대첩의 위업(?)을  이루고 말았답니다!"하고 큰소리 치고 있었다.



"야 이놈아! 나도 등록금 마련하는 고민 좀 해보자!"하고,
남들은 재수도 안하고, 제꺼덕 대학에 잘도 들어가는데,
삼수씩이나 하시느라 고달프셔서,


주로 쉬고,
틈나면 놀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할 수 없이 책 좀 보는 아들놈에게,


아버지가 개업한지 얼마 안되서,
한번에 수백만원 하는 등록금 마련 할려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고민좀 할 수 있는, 은전 좀 베풀 생각은 안해보냐고 혼을 낸 적이 있었다.


이눔이 그 말이 가슴에 남아 있었던 모냥이었다.


그리곤,
지난 수삼년 동안,
심각한 얼굴로 공부가 안될 수 밖에 없는,
성적이 안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준엄하게 아비에게 설명해 주던 우리 아들이,
8전 9기의 삼수대첩의 위용(?)을 달성하고,


불과 몇달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 요즘 애들은 왜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안하는지 모르겠어요!"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였기에 그 충격을 감당했지,
여늬 아버지였다면 숔크에 빠졌을 만한 말을 남발하는 것 이었다.


아버지로서의 나의 걱정은, 아들이 대학을 가고 못 가고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과, 대인관계에서의 당당함이 손상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아들의 밝고 유연한, 좋은 성격이, 행여나 삼수의 스트레스로 인해,
어두워지고 편협해지면 어쩌나 하는 점 이었다.


아들이 고맙다.


그 어려운,
자기와의 싸음에서 이기고,
아비를 놀려먹을 수 있는,
아버지를 깊이 위로해 줄 수 있는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 고맙다.


결과에 의해,
인생은 판가름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어떤 마음으로,
지금의 삶을 감당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 행복하면, 인생이 행복한 것이고,
지금 자신이 있으면, 자신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할 수 있다!"를 깨닫고,
사막에서도 살아날 자신을 외치는,
8전 9기의 삼수대첩의 위용을 달성한 나의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동네에,
스스로 이를 수 있었음이 고맙고, 대견스럽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버지는 니가 자랑스럽다!
바르게 서는 모습을 보여주어 고맙구나!"

























@#$*+ㄱㄷㅈ0
작성자 : 정말..  at 2008-09-18 15:25 Mod.  Del.
아버지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명문입니다. 여기서만 읽기 아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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