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전도자의 사명을 받았거든 !"

정광설 2009.04.22 12:14 조회 수 : 516



  미국에 계신 어머님과 통화를 했다. 여전히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하루
하루의 생활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함을, 죽음이 생을 이 세상과 갈라놓을 때까지
행복과 건강을 누리며 사는 기쁨의 생활을 여전히 자랑하고 계셨다.

  이제는 어느새 함께 지내는 노인 요양원의 대부분의 할머니들도 여든 아홉이나 되
신 어머님 보다는 젊고 어린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며 예수 믿고 몸도
마음도 영혼도 기쁘게 사는 기쁨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노라고 하시며, "내 걱정일랑 말아라!"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감사하는 생활의 기쁨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가능한 것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내가 더 먹었는데, 내가 방방마다 찿아다니며 노래도
해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기도도 해주고 하면 다들 너무 좋아해!"라고 말씀하시는 것
이었다.

  "일찌기 전도자의 사명을 받은 나인데, 아니 그깟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하
시며, 여기서도 열심히 그리고 훌륭히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시며, 죽는 그 날
까지 사명을 다하며, 기쁨가운데 살 것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밝고, 기쁨에 가득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렸을 때, 엄마의 인
생 역경을 글로 쓴다면 아마 책 열권으로도 모자랄 것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들려주
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열아홉의 나이에, 이 조선 땅의 큰 여성 일꾼이 되리라는 원대한 꿈과 포부를 안고,
지금으로 부터 70년전, 여성은 교육받을 기회가 좀체로 없고 어려웠던 시절에 신학
대학엘 갔다가, 니 아버지라는 남성에게 반하여 시집가는 바람에 학업을 중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한이 되어, 막내인 너가 크기만을 바랬단다!"하시며, 엄마가
37세 되시던 해에, 그러니까 이 막둥이가 드디어 국민학교를 들어가던 해에, "너가
도와주면 엄마는 너희들 낳아서 키우느라 못이룬 꿈을 이룰 수 있단다. 이땅의 위대
한 여성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펼쳐나갈 수 있단다! 날 좀 도와주지 않겠니?"하시며,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엄마의 꿈과 포부와, 인간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의
미있는 것 인가를, 세뇌(?)에 가깝도록 설명하고 설득해서, 7살 어린 아들은 뭐가 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이 어머니를 도와 어머니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
는 행동을 하는 것이, 엄청나게 훌륭한 일을 하는 것 이라는 확신에 차게 만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드디어 설득이 마무리 되던 날, "얘가 당신에게 할 말 있대요."하시면서 아버지 앞
으로 나를 디밀으셔서(?), 그때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아버지를 설득하던 생각이 난
다.


  "내가 학교 갔다 왔을 때 엄마 안계셔도 울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으니, 엄마 공부하
게 해주세요. 아버지! 네?"라고, 엄마가 가르쳐주신 대사를 영특했던 막내는 한마디
도 틀리지 않고, 감정까지 실감나게 넣어가면서, "막내가 아직 어린데 엄마가 공부한
다고 집 비우고 다니면 괜찮겠어?"하시며, 사뭇 엄마의 신학대학 복학에 부정적이신
아버지를 설득하는 중차대한 임무 수행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기특하게 여기셨던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못말리는 엄마 성격을 익히 알고 계시던
아버지가, 나의 탄원을 기회로 삼아 허락하시는 윈윈 전략을 발휘하신 것 인지는 몰
라도, 그렇게 해서 울 엄마는 나이 40에 대학 졸업생이, 대전 감리교 신학대학을 1회
로 졸업한, 당시로서는 드문 학사 출신의 여성 전도사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보라는 아버지의 질책이 두려우셨던 것인지, 모든 일에 철저한 엄마의 성격 때
문인지는 몰라도, 일곱 식구 뒷치닥 거리하고, 십리는 족히 되는 대학교까지를 뛰어
다니시며, 공부에서 만큼은 누구에게 지는 꼴(?)을 못보는 엄마의 성격 상, 밤새워 공
부하는 것이 일주일에 몇번씩 되는 대학생활 동안, 비록 성적은 20대의 동기들을 제
치고 일등 졸업을 하시기는 했어도, 아주 심한 위장병에 걸리고 마셨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아침에 어렴풋이 눈을 뜨면 머리맡에서 밥상 펴놓고 촛불
아래서 공부하시던 엄마의 모습이고, 그때 눈뜬 나를 보시며, "엄마는 아침밥하고,
너는 그 시간에 일어나 공부해야, 니가 나와 서로 당당할 수 있는 것 이란다!"라시며,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며, 행동으로 보여주시던
모습이다.


  그렇게해서 얻은 위장병이 날로 심해져서 급기야는 밥 한술 넘기기도 어려울 정도
가 되고, 피난시절 제주도에서 내가 세상 나오며 엄마 자궁까지 끌고 나오는 불효를
저지른 바람에 인연을 맺게된 위생병원이 전쟁 후에 서울에 자리했음으로, 서울까지
오가며 치료받으시던 그 약 보따리가 기억나기도 하고, 위산 검사하기 위해 옷을 지
키고 있는라, 학교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결석하고, 엄마 따라가 옷 지키며 앉
아 기다리던 그 퀴퀴한 냄새나던 지하의 검사실 복도도 50여년이나 된 지금도 생생
하게 생각이 난다.

  엄마 옷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생각보다 빨리 안나오셔서 불안하던 그때의 심정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고, 울먹여지는 것을 참고 앉아 있는 나를 옆에 계시던 어떤
아주머니가, "니가 엄마 보호자인가 보구나! 착하기도 하지!"하며 키냐고 작아서 어
려보이는 국민학교 3학년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서, 그 아이가 속으로 아주 뿌
듯함을 느끼고, 자신이 매우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엄마를 기다리며 무
서움으로 다가오는 불안을 이겨내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그때의 뿌듯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끔 진료실에 엄마와 같이 오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니가 엄마 보호자구나! 착하기도 하지!"하면서, 어렸을 때의 그
시절 생각을 하곤 하는데, 엄마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이런 생각들이
주마등 스쳐가듯 스쳐 지나갔다.


  뭔가 했다 하면 뿌리를 뽑는 성격 때문에, 특히 공부에서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어린시절부터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밤을 낮 삼아 공부하신 결과 일등 졸업의
영예와 동시에 아주 고약한 위장병을 얻게 되셨던 것이다.

  2년여에 걸쳐 서울까지 5ㅡ6시간 걸리는 완행열차타고 다니며, 지극정성으로 치
료받았지만, 결국에는 파란 눈의 그 의사 선생님이 이젠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
으니, 너무 먼 길에 괜한 고생하지 말고 그만 오라는, 사형선고나 같은 최후통첩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사형선고 받고 와서, 밥 한술 못뜨고 있는데, 밥이그렇게도 잘 넘어가냐?",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밥도 먹지 말라는 말이냐?"하며, 아빠 엄마가 폭폭해
하시며 다투시던 기억도 떠오른다.   

  아랫목에 누워 우리들 밥먹는 모습 보며 눈물 짓던 어머님의 삐쩍 마른 그 모습이
생각이 난다. 잠자다 어찌 눈이라도 뜨면, 무릎 구부리고 울며 기도하시던 엄마가
"깼니?"하시며, 머리 쓰다듬어 주시던 그 눈물 젖은 얼굴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기적이 임해서 치유받고, 회복되고, 50여년 가까이 흘러, 이제
어머님 연세가 여든 아홉이 되신 것이다.

  항상, 그때의 어려움과 절망과, 그리고 기도하시던 중에 방물장수 모습의 천사를
보내주시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을 알려주시어, 기적과도 다름 없는 회복을
이루었을 때의 감격과 감사를 잊지 않으시고, 듬으로 사는 인생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드림으로 살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커나오면서 지켜보며 지내온 지난 날
들이, 주마등 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옆에서 엄마를 항상 돌보아드리고 있는 작은 누나가, 어머님이 요즈음은 찬송가 외
우는데 맛들이셔서, 자기는 도저히 따라갈 엄두도 못낸다고 웃으며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꼭 어디라야 되니? 어디서든지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게 중요하지!  엄마는 행
복하게 전도자로서 이곳에서 주위 할머니들 전도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엄마
걱정하지 말아라!"하시며, "목소리 들려줘서 고맙다."하시곤 전화를 끊으시는 것이
었다.


  전화는 끊겼는데, "어디서든지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잊지않고 감당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단다!"하시며 밝고 행복하게 웃으시는, 이제 여든 아홉의 꼬부랑 할머니이신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나 말 대로, 화장도 이쁘게 하신다는 그 말에 공감이 갔다. 이렇게 마음이 아름답
고, 기쁨이 충만한 감사의 생활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고 있는 분이, 육체
인들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보다 많이 젊고, 엄마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과 위치에 있는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상(上) 노인도 저리 살고 게시는데......."생각을 하며,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
보며 반성한다!

  나에게 주어진 이 특별한 삶의 기회를 어떻게 보내는 것이 바른 길 인가를, 당신의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계신 나의 엄마가 더 없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어머님! 나도 엄마 닮는 아들이 될께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외쳐본다.

  "내 삶의 뿌리이고, 고향이고, 스승이신 나의 어머니여!"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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