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코메디와 명 강의의 차이는?

정광설 2009.06.20 15:42 조회 수 : 340



명 코메디는 그 코메디언의 능력이고, 명 강의는 그 듣는 사람의 능력이다!?


뭣 모르고, 부부라는 인간 관계에 대한 강의 부탁을 받고, 그저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읍(感泣)해서,
"어서 가서 최근에 깨달은 따끈 따끈한 이 생각을 빨리 전해야지!"하는 생각에만 빠져서,

청중이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지, 모임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 등,
실은 당연히 물어보고, 그에 맞추어 똑같은 말도 좀 다듬는 방향을 달리할 수 있었어야 되는데,

깨달음의 초창기 시절, 한창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 근질하던 때인지라,
덜컥 강의할 것을 약속하고, 약속 날이 되어 강의 장소에를 갔었다.



강의장을 찾느라 두리번 거리는데, 담당자가 나와서 반가히 맞으며,
조그마한 응접실 보다 약간 큰 방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강의 대상이 어떤분들인가를 묻고있는데,
점잖게 나이드신 분들 여나문 쌍들이 저녁식사 마치고 한두 쌍씩 모여오는 것 이었다.

모습들을 보니, 내 스승님의 스승 연배될 듯한 분들부터,
암만 적게 들어뵈는 분도 우리 아버지 연세는 되어보였다.

주최측에 살짝 물어보니,
은퇴한 교장 선생님 부부들과, 은퇴한 대학 교수 부부들 모임이라는 것 이었다.



"아이쿠머니나 큰일났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강의를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진료중 부부관계의 갈등에 대해 상담하며 깨달은 내용들이니,
그냥 열심히 말씀드리자 생각하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서 무엇인가를 구경하는 듯한,
빙긋이 미소지으며,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한(순전히 나의 착각일 것 임이 분명하지만),
혼자 신나서 이런저런 소리 조잘대는 어린아이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다른 때, 다른 곳에서 같으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열강을 하던 대목에서 조차,
버벅거리고, 더듬거리고, 말이 연결이 끊겨 쩔쩔매고 쌩 땀만 흘리다가 겨우 한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마디로 곤 죽을 쑨 강의였던 것이다.

겨우 강의를 마치고 질문을 받는데,
어느 분이, "강사 양반! 혹시 갈등(葛藤)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하고 묻는 것 이었다.

부부지간의 갈등에 대해, 그 원인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접근하고 극복하는 것이,
부부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인가에 대해 열불나게 강의를 하고 난 그 강사에게,

"너 갈등(葛藤)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떠든거냐?"하는 식의 질문을 점잖게, 턱하고 던지는 것 이었다.



부부간의 갈등이 무슨 뜻인지, 어떤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를,
부부간의 갈등이 불러올 수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에 대하여 숙고(熟考)하며 갈등이란 말을 쓰는 것과,

그 갈등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국어학적으로 어원을 밝혀 아는 것 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질문은, 부부갈등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것이냐와, 그것을 주위의 어린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려주고,
전파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방법에 대한 관심과 질문이 아니라, 비슷한 것 같긴 하지만 실제는 강의의 핵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용된 단어의 국어학적 식견에 대해 묻고 있는 것 이었다.

일찌기 한자에 대한 원한과 원망이 컷던 나인지라, 알 턱이 없었다.

"그것은 칡나무를 의미하는 갈자와, 등나무를 의미하는 등이 합한 것으로,
칡 덩쿨과 등나무 덩쿨이 얽힌 것 같은, 풀리기 어려운 어려움이라는 뜻이야!"하고,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이, 강사의 이야기 내용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가르치는 것 이었다.

"좋은 것 배우고 갑니다!"하고, 그 덕분에 나는 그 뒤로 어딜 가서든지,  
폼 잡으며 엄청 한자의 뜻을 많이 잘 아는 사람처럼 됐지만,

그분들은 얼마나 이미 행복해서 별로 들을 필요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작은 깨달음이나마 얻을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옇든 그날의 강의는, 완전한, 더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죽을 쑨  강의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오랬동안 얼굴이 붉어진게 지속됐던지.....(ㅎㅎㅎ)



그런데 이보다 더한 일이 발생했으니,
우리 교회 원로 목사님께서, 나를 은퇴한 목사님들 모임에 강사로 천거를 하신 것 이었다.
원로원에 와서 노인의 정신건강에 대해 강의를 하라시는 말씀이었다.

평생을 인생의 영혼구원에 관심을가지고, 진짜로 평생을 정신건강에 대해 공부하시다 은퇴하신,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신 분들 앞에 가서, 공자 앞에서 문자 논하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아야 할 일이 벌어진 것 이었다.

순종을 안할 수는 없는 일이라, 여러 원로분들을 모시고, 그 중에는 엄청난 큰 교회를 담임하셨던 분도,
큰 대학 총장을 엮임하신 분도, 참으로 크신 어른들과 그 원로 분들 못지 않은 전문가이신 사모님들 모인 곳에 가서,
하는 수 없이 강의를 시작했던 것이다.



강의를 하면서, 시작할 때의 긴장감과, 죄송스럽기도, 쑥스럽기도 한 느낌은,
강사를 바라보는, 뭔가 배우고자 하는, 이 젊은 ("내 나이가 그리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분들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같은 나이 아닌가?") 정신과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감탄을 표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강의 듣기에 열중하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그만 발동이 걸리고(?) 신이 나버린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야말로 신나게 해드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들도 우리 아버지 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는 분들 되세요!"하고 축복의 말씀으로 강의를 마치고,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단을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내 실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감히, 평생을 영혼의 문제에 관해 깊은 경지에서 거닐던 그분들 앞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일까?

물론 그분들의 분야와, 내가 종사하는 분야는 비슷한 것 같지만, 또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어,
정신의학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가능하다손쳐도,

쉽지 않을 만한 일이 너무 편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분들의 배우고자 하는 따스한, 그리고 집중하여 받아들이는,
시선과 자세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 풋내기인 자네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만한 것이 있겠어?"하고,
쳐다보며, 하는 양을 지켜보는(구경?) 자세와,

"오늘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귀와 마음과 영혼을 열고 듣는 자세와의 차이가,

같은 내용을, 같은 사람이 말하는데도,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명 코메디는 명 코메디언의 능력이 아닐까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내가 어디가서 강의하면서 잘되는 날과 죽을 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듯이,

일단 중요한 것은 본인이 얼마나 충실하게 준비를 했느냐에 있겠지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요소는, 그것 역시 관객의 자세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젊은 청춘 남녀가 손을 꼭 잡고, 그리도 재미있어 하며,
줄을 서서 들어가 박수와 환호 속에 즐거워하는, 그 유명한 코메디를 보면서도,
나는 하나도 안 우습고, 때로는 저런 걸 보고 웃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코메디에 대한 반응도,
그 코메디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보는 사람이 웃을 준비가 되서 보는 것인지,
"나를 한번 웃겨봐라!"하고 멀건히 쳐다보고 있는 것 인지가,
그렇게도 큰 차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옛 어른 들의 말씀가운데 ,
"세살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씀이나,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 보면 반드시 스승이 있는 법이다!"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나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깨우침의 말씀인 것이 새삼 마음 깊이 느껴진다.


상대의 강의 능력이나, 웃기는 실력을 평하고, 탓하기 이전에,
나의 배움에 임하는 자세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나의 듣는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귀한 배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들려지지 않은 말씀이 쓰레기 통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그 불쌍한 인생이 쓰레기 통에 쳐박히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교만과 거만이, 알량한 헛된 자부심이, 나의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아,
홀로 거룩한 것 같지만, 실은 관계를 더 어렵게 하고,
스스로를 외롭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 임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명 코메디와 명 강의는, 그 코메디언이나 강사의 차이에서 가려지기 보다,
보는 이, 듣는 이의 차이에서 가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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