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도우미#$+0ㅅㄱㄷㅈ충찬페문

정광설 2012.11.23 19:15 조회 수 : 613

ㅡ   후기(後記)  ㅡ
                      
      ‘행복 요청이’가 아니라 ‘행복 도우미’로 살리라!


유사이래(有史以來)로 아니 유사이전(有史以前)까지를 통 털어, 인류의 역사를 총 망라하여 소위 자칭(自稱), 타칭(他稱) 현자(賢子)까지는 못 되어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자신이란 존재가 뭇 삼라만상의 것(物)들과 생존원리에 있어서 무엇인가가 좀 다른 존재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빠짐없이 다 가져보았을 것임에 틀림없고, 또 단언컨대 그 누구도 “이것이 정답이요!”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던 질문, “인간은 왜 사나?”라는 우문(愚問)에 기고만장(氣高萬丈),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맞다! 그게 정답이다!”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만한 우답(愚答)을 한 번 피력해볼까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 하면 그 이유는 간단 명쾌하다.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다 정확한 이유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생존의 기회를 어쩌다가 우연히 마주친,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무슨 일인가 하다가 할수헐수 없어 덤터기 뒤집어 쓴 것같이 받아들여, 삶 자체를 부담과 고뇌와 갈등과 고해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이런 사람들의 세계관과 달리, 자신을 천하보다 존귀한 자의 신분으로서 이 세상을 살며,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예배자로 살 수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왜 사느냐?”, “나란 존재가 어떻게 해서 저다지도 많고도 많은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 하필이면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 수 있게 되었느냐? 나의 생명은 어떻게 비롯되었느냐?”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창조주의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 생명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해답은 벌레만도 못하고, 신을 부정하는 이들이 곧 잘 둘러대는 가설인, 우주의 먼지들이 모이고 뭉친 집합체의 돌연변이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수준에서 헤아려 밝힐 수 있는 영역의 주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왜, 어떤 원리와 원인으로 나라는 존재가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은 모르고 헤아려 밝혀낼 재간이 없을지라도, 자신이 생존을 딛고 서서 자연과 구별된 특별한 존재로서 살 수 있음을, 자신만의 삶을 일구어 낼 수 있음을 자각하고 제대로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음 만이 다 인줄 생각하며, 단지 편안한 생존상태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잘 사는 것인 줄로 생각하며, 육신의 안락과 심신의 안녕만을 추구하며, 그 생존을 딛고 서서 인간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뇌하며 자신의 삶을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으로 일구어내려 노력하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보내는 자일 것이냐가 중요하다. 비록 누구에게나 똑같이 살 기회가 주어졌을지라도, 본래 자신이 존귀한 자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고 받아들여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지극의 행복을 맛보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의 품성을 나눠받은 영적 존재를, 물리적이고 소위 인간의 삼차원적인 지적 수준에 입각한 과학이라는 인간만의 잣대를 가지고, 인간의 특성과 존재이유를 설명코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창조주의 창조섭리를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발전한 과학이라는 잣대로 설명하고 규정하고 파헤칠 수 있고, 헤아리고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시각과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며, 모르는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지극히 과학적이지 않은 설명과 논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과학이냐 비 과학이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통찰(洞察)해 보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규명하여 밝혀낼 능력은 없으나, 내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오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는 모를 지라도, 어디론가, 마땅히 가야할 바른 곳을 찾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표류하는 인생일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단하지 않을 수 없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주신 삶의 기회를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잘 가꾸고 일구어서, 이 같은 귀한 삶의 기회를 주신 그분을 찬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삶을 일굴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일 것이냐, 아니면 이러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선하신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본래의 존귀한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고, 멸망하는 짐승의 길을,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자연흐름의 한 부속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런 류(類)로 생존에 급급하다 아무런 가치도 보람도 만족과 감사도, “나의 삶을 본받아라!”라는 후손에게 남길 말도 찾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갈 것이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있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면, 자신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정하여, 자신의 삶이 다 하는 그날까지 진실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그 목적지를 향한 그 길을 밟아 나아가고, 그 본향의 항구에 닻을 내릴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항해하며 나아가는,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 기쁨과 보람에 넘치는 삶,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으로, 죽음의 어두운 세력에 지배받아 죽고 멀리 떠난 영혼들의 생명을 회복시키는데 썩어지는 밀알의 역할을 감당하는, 아름답고 성공적인 새로운 삶으로 살 것을 결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거창(巨創)하고 숭고하고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즉, 자신의 정체에 대한 확고한 정립과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정체성이라 말할 수도, 달리는 사명의식과 소명의식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92세를 일기로 두 달 전 천국에 불리워 올라가신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전도자의 사명을 받았거든, 내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란다. 내 사랑하는 막둥아! 이 엄마는 너 내 아들 광설이도 엄마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수 있는 축복받은 인생이길 바란다. 또 그렇게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매일 새벽 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단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80여명의 노인들이 계시는 양로원 같은 노인병원에서 돌아가시는 바로 그날 그 마지막 드린 예배의 순간까지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시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배 후 남들이 기피하는 헌금 계수하시다 돌아가신, 전도자의 사명을 기쁨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시던 어머님의 삶이 나에게 묻고 계심을 느낀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지?”, “네 사명은 무엇인데?”, “그러니까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너는 너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니?”, “아주 쉽게 말해서 너 뭣 하는 사람이니?”라고 묻고 계시는 것이 마음으로 깨달아진다.

임상(臨床)에서 만나는 이런 저런 어려움과 갈등을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가 무엇인가에 대한,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 경험하는 아픔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상대에게서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세상으로부터 일 수도 있고,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고 무너짐을 경험할 때 만나는 갈등과 괴로움일 수도 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은 자신이 상대의 기대에 어떻게 하면 보다 정확하고 충실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부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노력하기 보다는, “왜 저 사람은 나에게 잘 해준다고, 날 행복하게 해준다고 그렇게 큰소리치고 떠벌리더니 고작 요런 정도밖에 못해주는 것일까?”하고 상대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자신의 행복을 책임져주길 원하고 기다리고 요청하고, 늦다고 투정하고 칭얼대고 화내는 문제들이, 거의 모든 환자들의 심리적, 정신적 갈등의 기저에 깔려있는 문제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신건강 의학과 전문의로서의 나의 할 일은, 이런 스스로를 불만과 불평과 불행의 장으로 열심히 모셔다가 좌정시키고 있는 수많은 ‘행복 요청이’들에게 자신들이 느끼는 불만과 불평과 불행의 원인은 상대가 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자신의 왜곡된 마음, 있는 것 보다는 없는 것을 더 잘 보고, 있어지는 변화 보다는 아직 미처 일어나지 못한 것이나, 없어지는 변화를 보는 데 익숙하고, 문제에 다가가고, 문제에 부딪쳐 해결책을 모색하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행복을 그 누군가가 책임져줘야 하듯 자신의 삶의 변활 일구어내는 데 미온적이고, 게으르고, 수동적인 데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가르치고, 자극하고, 설명, 설득해서, 즉, 듣는 그 누군가가 가장 효과적으로 나의 도움과 조언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결단하여, 그들의 심성에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왜곡된 비합리적 사고방식이 합리적이고, 선하고, 상대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할 수 있는 심성으로 바뀌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주는 사랑’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깨달아, 이 세상에 살아있을 수 있음을 감사하고, 더 열심히 잘 살려고 노력하고, 행복을 느끼는 가운데 자신과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의 빛과 향기를 풍기는 존귀한 자의 삶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복 도우미’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한 번 사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도 한 번에 하루 씩 산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하루도 너무 길게 잡은 것이다. 사람은 한 번에 이 한 순간만을, 그것도 그분이 살려주심을 전제로 했을 때나 겨우 살아있을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러니까 찰나(刹那, 칠십 오 분의 일초) 동안만 겨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지금 이 순간의 찰나(刹那) 이전은 이미 지나가서 지금은 없고, 따라서 지금 없는 그것에 내가 영향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수밖에 없고, 지금 이 순간이란 찰나(刹那) 이후의 생은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엘 샤다이,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만 있는 것일지니,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지금 이 살아 있는 찰나(刹那)의 시간뿐인 것이다.
이 나의 모든 삶의 기회를, 이 짧디짧은 귀한 기회를, 누굴 원망하고, 자신이 행할 생각은 없이 누군가에게 대신 행복을 가져다달라고 요청하고 기다리며, 늦게 온다고 투덜대고 불평하며 허비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이 찰나(刹那)의 순간을 영원처럼 받아들이며,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나와 만나는 삼라만상이 아름답게 변화하고, 행복에 충만해질 수 있게 하는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행복 도우미’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남을 행복할 수 있게 도움으로 내가 참다운 행복을 경험하고 맛 볼 수 있음이니, ‘행복 도우미’의 삶은 너도 나도 모든 세상을 아우러 행복의 나라로 함께 여행하는 능력의 삶인 것이다.
‘행복 요청이’에 머물러 불평불만, 불행을 곱씹으며,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를 부르짓고, “신은 죽었다!”라고 절규하며, 불안에 사로 잡혀 스올로 스스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자가 아니라, ‘행복 도우미’로서 사랑을 함께 나누고,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살아서 행복을 누리는, 감사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참된 행복의 나라, 본향에 대한 소망으로 서로 마음으로 함께하는 ‘행복 도우미’의 삶이 나의 삶의 모습이고, 정체성이고, 소망이고, 그리고 나의 사명이자 소명일 것을 받아들이고 결단한다.

이제 나도 그리 머지않아 아마도 단언컨대 불과 백년이 다 되지 못하여 틀림없이 본향에 이를 터인데, 그때 아버님, 어머님 뵈옵고, “아버님! 어머님! 고맙고도 훌륭하신, 존경받고 본받아 마땅한 부모님 덕분에, 바른 가르침으로 양육 받고, 부모님의 바른 삶의 모습을 본받아 배워서, 이 막둥 아들이 ‘행복 도우미’로서 행복하게 살다가, 출장 마치고 이제 돌아왔습니다!”라고 인사 여쭐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나는 주신 사명 잘 감당하며 ‘행복 요청이’들을 ‘행복 도우미’로 개조시키는데 삶을 다 바쳐 노력하는, 칭찬받을 수 있는 ‘행복 도우미’의 삶을 이후로도 더욱 성실히 일구어갈 것을 다시 한 번 결단하며 천명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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